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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사의 잡다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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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회개란? - 내가 생각하는 정확한 성경적 회개의 정의

진갱 2015. 3. 20. 21:47

  회개에 대한 정의가 많은 것 같다. 일단 회개를 말하게 되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이 희석될 수 있거나 결국은 아예 포기하게 되는 것이라는 논리가 많은 것 같다. 성경에는 분명 구원을 받음에 필요한 조건에 있어서 믿음만을 말할 때도 있고, 회개만을 말할 때도 있고, 둘 다 같이 제시하는 경우도 있다.

 

 믿음만 필요한 경우

  개인적으로 나는 회개를 이미 한 사람들. 즉, 믿음만 필요한 사람들.. 예를들면 고넬료와 같은 경우이다. 그는 이미 회개를 해서 경건한 삶을 살고있는 상태로 어쩌면 구약적 "믿음". 즉, 오실 예수를 믿는 메시아적 신앙을 소유했기 때문에 경건한 삶이 가능했다.

  그러나 예수가 오신 후 그의 신앙은 업데이트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가서 예수님이 오셨음과 복음을 선포한 후 성령을 내리게 하시니 고넬료가 성령을 받았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구원"이라고 표현한다. 학자들이 어떻게 고넬료가 등장하는 이 부분을 해석하는지는 모르겠다. 융통성 없이 "성령받은 것도 구원이구나!" 한다거나, "고넬료는 원래 구원받은 자가 아니야. 그냥 바리새인처럼 행위구원론자였어."할지도 모르겠다.

  이제부터 고넬료 이야기를 해석해 보겠다. 고넬료는 분명 구약적 의미에서 "구원"을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신 후 새로운 차원의 신앙이 필요했다. 예수께서 오시므로 지구상의 영적 분위기가 변해버렸다.(표현은 이상하지만, 그렇지 않을까?) 그러나 그는 이미 "회개"한 상태였다. 그리고 오실 예수를 믿었으나 믿음의 업데이트(?)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새로운 차원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그의 믿음이 업데이트가 되었다. 그리고 바로 성령세례를 받았다.(그가 요한의 세례를 받았었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다시 물세례는 필요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그러므로 그는 분명 업데이트. 즉 새로운 구원을 받았다. 그림자였던 것이 실체가 된 것이다.

 

  회개가 필요한 경우

  또 한 경우이다. 바로 회개가 필요한 경우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요 8:31)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그들은 믿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 말에 거해야 참 제자가되." 무슨말인가? 회개하란 말씀이다. 정확히 어떤 원리로 믿음과 회개가 작동되는지 알기는 어렵다.

  우리가 드럼이란 악기를 연주한다고 해보자. 두둘겨 보기도 전에, 드럼치는 자세의 각도는 어떠해야하며, 더블스트로크를 칠 때 정확히 근육과 뼈대가 어떠한 원리로 작용하며.....이런 것을 따지자면 신앙생활 못할 것이다. 나중에 세포까지 따지지 않겠는가? 물론 이러한 작업도 세월이 지나가며 신학이 발전되가며 필요할 것이다.

  어쨋든 회개가 필요한 경우가 있다. 아래에서 다루겠지만, 회개 없이 믿음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의 믿음은 "가짜"인 것이 된다. 그 아랫 구절들 내용을 읽어 보면 알겠지만,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하시며 그들은 죄의 종임을 말씀하신다. 믿음이 가짜일 경우 처음으로 돌아가 회개를 해야한다. 그럼 회개란 무엇일까?

  회개와 믿음에 대해 설명을 해보겠다. 일단 개인적으로 믿음과 회개가 따로 필요할 수도 있다고 본다. 물론 그 두가지가 같이 작용해야 구원이 된다는 의견은 사실인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것이 동시에 항상 일어나야 한다는 것은 오해로 여겨진다.

 

  믿음이 먼저냐 회개가 먼저냐

  토마스 왓슨과 여러 훌륭한 분들은 말한다. 믿음이 먼저라고. 그들은 현실적인 것을 따진다. "아니, 믿음이 없이 어떻게 회개가 가능해? 회개하면 행위가 바뀔텐데 믿음이 없이 어떻게 행위가 바뀌어??" 옳다. 만약 회개가 그들이 말한 것처럼, 반드시 행위를 수반하는 것이라면 그렇다. 회개의 정의에 대에서는 조금 뒤에서 다루겠다.

  어떤 분들은 말한다. "성경이 믿음과 회개를 말할 때 회개를 먼저말하니 회개가 먼저인게 옳다!" 그들의 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들도 회개가 항상 행위가 수반되어야 함을 가정하고 말을 한다면, 행위 구원의 위험이 도사리게된다. 물론 회개가 성경적으로 먼저인것이 맞다.

 

  회개의 정확한 정의

  새로운 시도인지는 모르겠다. 나와 같이 어떠한 학자들이 주장했는지는 모르겠다. 나의 논리가 반드시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유능한 학자분들이 내 이론을 검증해보셨으면 좋겠다. 나로썬 그 방대한 자료를 활용할 능력이 없는 듯 하다.

  회개란 무엇일까? 이 모든것을 종합해 볼 때, 회개는 의지의 변화이다. 사람은 의지가 있다고들 말한다. 심지어 칼빈도 자유의지를 논하는 듯 하다. 루터도 노예의지라는 요상한 말은 하긴 했지만, 결국 의지의 존재를 인정하는 듯 보인다. 의지를 너무 인정한 나머지 행위로 빠지면, 이단이 된다. 행위 구원 이단 말이다. 의지를 너무 무시하면, 무행위로 가면 구원파 이단이 된다. 무율법주의인 것이다.

  회개가 의지란말인가? 그렇게 보면 모든 의문들이 박살난다. 일단 그전에 논해야 할 것이, 의지가 행위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일단 나는 의지는 행위와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의지는 어떤 것을 하고자 하는 "선택"이지, 행위로 표현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회개가 근본적으로(물론 은혜를 의지하여) 의지의 작용이라면, 회개가 행위가 아닌 것이 되니 일단 회개가 먼저인 것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어진다. 즉 회개는 의지, 곧 그 사람의 선택이므로 행위일 수가 없다. 회개가 행위이기 때문에 믿음이 먼저라는 의견은 무지한 말이 된다. 왜냐. 회개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개가 먼저인 것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구원의 과정

  구원의 과정을 한 번 예상해 보자. 일단 말씀을 듣는다. 그의 심령에 빛이 비춘다. 어디로 가야할지 어느 것이 참 길인지 선포된다. 그의 양심이 작용한다. 그는 선택을 해야한다. '간질간질 쾌감이 좋아', '나의 명예는 어떡하지?', '이 돈 나를 즐겁게하는 돈~!', 그런데 옳은 것은 이것이야. 이 길로 가야하지만 난 세상을 택하겠어! 그러면, 그 사람은 더이상 볼 것없다. 다음에 기회가 있을지 몰라도, 그에겐 먼지만 떨어주면 된다. 그러나 복음 진리를 받아들인 후 그가 회개했다고 치자. 즉 그의 선택, 그의 의지를 바꾸었다고 생각하자.

  그러면 율법적인 상태로 들어간다. 로마서 7장의 상태로 가는 것이다. "누가 이 죽음에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하고 말이다. 그리고 복음이 증거된다. 주 예수를 믿는다. 평안이 임한다. 죄가 이겨지기 시작한다. 거듭난다. 하나님이 더이상 그를 죄로 여기시지 않는다. 구원을 받았고 구원을 이뤄간다.

  그 후 성화의 과정이 진행된다. 그 때부터는 기독교적으로 바른 사상이 넘치는 것 같다. 그래서 다룰 필요가 없어 보인다.

 

  말씀의 역할

  마지막으로 말씀의 역할에 대해 말하고 싶다.

  말씀의 역할은 옳은 것을 드러내는 것 곧 빛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의 양심을 찔리게해 바른 길을 보여주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설교요 말씀이라고 생각한다.